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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Women 2013 제가 가진 99개의 문제점, 뇌성마비는 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I got 99 problems... palsy is just one) | 메이순 자이드(Maysoon Zayid)
보여주는남자 2018. 6. 7. 00:00I got 99 problems... palsy is just one | Maysoon Zayid
게시일: 2014. 1. 3.
안녕하세요, TEDWomen 참석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환호)
충분하지 않군요.
TEDWomen 여러분, 안녕하세요!
(환호)
제 이름은 메이순 자이드 입니다.
저는 지금 취한게 아니에요.
하지만 저를 세상에 나오게 한 의사는 제 엄마를 여섯 방향으로 여섯 번 배를 갈랐다고 하더군요.
그 과정에서 불쌍하게도 저는 질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뇌성 마비를 겪고 있죠.
이 말은 즉, 제가 몸을 계속 떨게 된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전 지쳤어요. 전 마치 샤키라 같아요.
무하마드 알리를 만난 샤키라죠.
(웃음)
뇌성마비는 유전되지 않아요.
태생적 결함도 아니구요. 여러분이 걸리지도 않을 거예요.
아무도 제 엄마의 자궁에 저주를 퍼붓지 않았구요.
저는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는데 제 부모님은 사촌이었거든요.
(웃음)
그건 제가 태어날 때 일어났던 일처럼 사고로 일어났어요.
이제, 여러분께 한가지 경고해야겠네요.
저는 여러분에게 영감을 드리지 않을 거구요.
저는 이 강연장의 누구도 저 때문에 기분이 우울해지지 않으셨으면 해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인생 중 어느 한때에는 여러분도 장애가 있길 바랬었거든요.
저랑 함께 한번 떠올려 보아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러분은 쇼핑몰에 있어요.
여러분은 주차공 간을 찾아 돌고 돌죠.
그리고 뭘 봤을까요?
16개의 빈 장애인 전용 주차 공간이예요.
그리곤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아, 나 그냥 조그만 장애를 가질 순 없나?"
(웃음)
또, 이것도 말씀 드릴께요.
저는 99개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요. 뇌성마비는 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강박증 올림픽이 있다면 저는 아마 금메달을 땄을 거예요.
전 팔레스티안 사람이고 무슬림 여자에 장애인인데다가 뉴저지에 살고 있죠.
(웃음)
(박수)
만약에 여러분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나아지게 해야할거예요.
뉴저지의 클리프사이드 파크는 제 고향입니다.
저는 제 동네와 제가 앓고 있는 병의 머릿글자가 같다는 사실을 늘 좋아했습니다.
또한 제가 집에서 뉴욕까지 걸어가고 싶어하면 걸어갈 수 있다는 점을 좋아했어요.
뇌성 마비를 가진 사람들의 대다수가 걷질 못해요.
하지만 제 부모님은 '할수 없다'는 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제 아버지 만트라는
"넌 할수 있어. 넌 뭐든 할수 있어!" 였죠
(웃음)
그래서, 저희 세 자매들이 걸레질을 하면 저 역시 걸레질을 해야 헀어요.
저의 세 자매들이 공립 학교를 다니면 저의 부모님은 교육 당국에 소송을 내서라도 저를 입학시키게 했죠.
그리고 우리가 올A 를 받지 못하면 모두가 엄마의 슬리퍼로 맞았어요.
(웃음)
저의 아버지는 제가 다섯살 때 제가 신발로 그분의 발등을 딛고 서게해서 걷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썼던 또 다른 방법은 1달러 지폐를 제 앞에 매달아 따라가게 한 것이었죠.
(웃음)
저의 내적 욕구는 무척이나 강해서 -
(웃음)
네, 그래서 유치원에 가던 첫 날, 저는 여러번 맞은 침팬치처럼 걸을 수 있었죠.
제가 자랄 때, 저희 동네에는 아랍인 가족이 겨우 여섯 있었어요.
그들이 모두 저희 가족이었죠.
지금은 아랍인들이 스무 가족 살고 있는데,
그들 모두는 여전히 저희 가족들입니다. (웃음)
우리가 이탈리안인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아요.
(웃음)
(박수)
그것은 9/11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정치인들이 캠페인 슬로건으로 "저는 무슬림을 혐오합니다."라고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지기 이전이었어요.
저와 함께 자라온 이들과 저의 신앙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라마단 기간이 되어되자
제가 굶어 죽을까봐 매우 염려하기 시작했죠.
저는 그들에게 3달 동안 버틸만한 지방이 충분있다고 설명해야 했어요.
그러니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금식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였지요.
저는 브로드웨이에서 탭댄스를 췄어요.
네, 브로드웨이에서요! 굉장했죠.
(박수)
저의 부모님은 물리 치료의 비용을 감당하시지 못해서 저를 댄스 학교에 보내셨어요.
저는 발꿈치로 춤추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 말인 즉 제가 발꿈치로 걷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저는 뉴저지 출신입니다.
뉴저지 사람들은 세련되게 보이려고 신경을 쓰죠.
그래서 제 친구들이 하이힐을 신으면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이 여름 방학을
뉴저지 해안에서 보낼 때,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름을 전쟁 구역에서 보내야 했어요.
왜냐하면 제 부모님들은 우리가 매번 여름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마돈나처럼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죠.
(웃음)
여름 방학은 주로 아버지께서 저를 치료하시는 시간으로 채워졌어요.
그래서 전 사슴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뜨거운 컵을 제 등에 두르기도 하고
사해의 물을 마시기도 했어요.
그리고 제 눈에서 물이 끓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효과가 있군! 효과가 있어!"
(웃음)
저희 가족이 발견한 한가지 기적적인 치료법은 요가였어요.
이 말을 해야겠습니다. 요가는 정말 지겨워요.
하지만 요가를 하기 전에 저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스탠드업 코메디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 있죠.
제 부모님은 제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불가능한 꿈은 없다고 하셨고,
저의 꿈은 언젠가 낮에 방영되는 드라마 "종합병원" 에 출연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차별 금지 조치가 취해진 시절에 대학을 다녔고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저는 모든 특별 배려군에 해당되었거든요.
저는 연극학과의 애완 동물 여우원숭이 같았어요.
모두가 절 좋아했죠.
전 똑똑하기엔 좀 부족한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 해줬구요.
저는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습니다.
숙제를 해준 아이들도 모두 A였구요.
제가 "유리동물원"의 유리동물원: Tennessee Williams의 희곡 한 장면을 선 보일 때마다
제 담당 교수님은 흐느끼셨어요.
하지만 전 한번도 출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제가 졸업반이 되었을 때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잭슨에서는 아주 느린 춤을 춘다."
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어요.
그 연극은 뇌성바비를 가진 여자 아이의 이야기였어요.
제가 뇌성마비를 가진 여자잖아요.
그래서 전 들떠서 이렇게 외쳤어요.
"내가 드디어 배역을 맡게 됐다!
나는 수족전증도 있잖아!
드디어 자유! 드디어 자유!
하느님 감사합니다. 전 드디어 자유롭게 되었어요!"
하지만 전 배역을 따지 못했어요.
(웃음)
쉐리 브라운이 그 역을 가져갔죠.
저는 연극학과의 학과장을 쫓아가서
마치 누군가 제 고양이에게 총을 쏜 것 마냥 광란적으로 울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왜냐고 물었죠.
대표는그 이유가
제가 스턴트(위험한 장면)를 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전 말했죠. "이보세요, 만약 제가 스턴트를 못한다면 아무도 그 역을 못해요."
(웃음)
(박수)
그 역은 정말 말 그대로 제가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마비가 없는 배우에게 그 역을 줬어요.
대학은 삶의 재판이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는 장애가 없는 연기자가 스크린 위에서 장애를 가진 척 연기를 해온 추악한 역사가 있죠.
졸업을 하자마자 저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리고 저의 첫 연기는 오전에 방영되는 드라마의 엑스트라역이었지요.
제 꿈이 현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식사하는 사람"의 배역에서 "미친 베스트 프랜드"로 곧 나아질 거라 믿었지요.
하지만 그 대신 영광스런 가구의 하나처럼 남아서
그래서 여러분은 제 뒷통수만 알아보실 수 있을거예요.
저는 캐스팅 감독이 애송이같은 소수 민족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사람들만 고용해요.
하지만 그 규칙에 예외는 있죠.
저는 자라면서 우피 골드버그, 로잔드 바(Roseanne Barr), 엘런을 보며 자라왔어요.
이 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코메디언이라는 거였죠.
그래서 제가 웃기게 된 겁니다.
(웃음)
(박수)
제 첫 번째 일은 유명한 코메디언을 뉴욕에서 뉴저지의 쇼 장소로 안내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가 뉴저지 고속도로에서
감속하던 중에 자신이 뇌성마비에 걸린 여자와
함께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보였던 그 표정을 잊지 못할거예요.
저는 미국 전역의 클럽에서, 또 아랍과 중동에서도 공연했습니다.
검열도 숨김도 없이 말이죠.
그 어떤 사람들은 제가 아랍권의 첫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말하더군요.
전 처음이라고 말하는걸 좋아한 적이 없지만 여자들은 재미가 없고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식의 불쾌한 소문은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2003년에 저의 의형제인 딘 오베이달라와 저는 뉴욕의 아랍계 미국인 코메디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이제 10년째가 되는군요.
우리의 목표는 대중 매체에서 아랍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었어요.
동시에 남아시아인과 아랍인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캐스팅 감독에게 알리는 것이었죠.
(웃음)
주류 아랍인에 대한 편견은 장애에 대한 편견이라는 도전을 이겨내는 것 보다 훨씬, 훨씬 쉬웠어요.
2010년 저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키스 올버만의 카운트다운" 이라는 케이블 채널의 뉴스 프로그램에 손님으로 초대되었어요.
저는 마치 프롬(미국 고등학교의 졸업 무도회) 에 가는 것 마냥 걸어갔죠.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스튜디오로 끌고 가더니 뱅글뱅글 돌아가는 회전 의자에 앉히더군요.
그래서 저는 무대 감독을 쳐다 보고는 "죄송한데, 다른 의자는 없나요?" 라고 말했죠.
그런데 그녀는 절 쳐다보더니 "5, 4, 3, 2..." 라고 하더니 생방송에 나오게 되었죠.
저는 앵커의 책상 한쪽을 잡고 있어야 했어요.
그래야 제가 나오는 부분에서 화면에 나오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니까요.
인터뷰가 끝났을 때 전 몹시 화가 나 있었어요.
드디어 기회를 잡았는데 전 그걸 망쳤고 다시는 초대되지 않을 거란걸 알았죠.
하지만 저는 다시 올버만의 초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풀타임 기고자로 고용되었고
그는 제 의자를 테이프로 고정시켜 줬어요.
(웃음)
(박수)
제가 케이스 올버만과의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네티즌들은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아이들이 잔인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어린 아이나 성인으로 놀림받은 적이 없어요.
불현듯 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웹 상에서 만만한 대상이 된 것이죠.
저는 온라인에서 동영상 보다가 이런 글들을 보았어요.
"요, 저 여자는 왜 몸을 비틀어?"
"요, 저 여자 정신 지체야?"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한 글은
"불쌍한 불평 불만 테러범들아, 그녀가 앓고 있는게 뭔지 아니? 우린 그녀를 위해 기도해야 돼"
라는 내용이었어요.
어떤 글에서는 저의 장애를 제 자랑거리에 넣으라고 하기도 했어요.
극작가, 코메디언, 뇌성마비 이렇게요.
장애는 인종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예요.
만약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비욘세를 연기할 수 없다면
비욘세도 휠체어에 탄 장애인 연기를 하지 못할 거예요.
장애는 가장 큰-
네, 박수쳐 주세요.
(박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가장 많은 소수자이지만 우리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입니다.
의사들은 저에게 걷지 못할거라고 했지만 저는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서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의 소셜 미디어와 함께 성장해 왔다면 전 아마 서있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미디어와 매일매일 여러분의 삶에서 장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장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욱 퍼져나가게 되면 인터넷 상에서의 혐오감도 더 커지지 않을겁니다.
아닐수도 있지만요.
여전히 한 아이를 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마을이 필요합니다.
저의 구불구불한 역경 많은 인생 경험은 저를 특별한 곳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저는 레드 카펫 위에서 드라마 주인공 수잔 루시와 드라마의 상징 로레인 알버스의 옆에서 걷게 되었어요.
저는 아담 샌들러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고 저의 우상이자 너무나 멋진 데이브 메튜와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열광적인 아랍" 이라는 수식어로 월드 투어를 하는 유명인이 되었죠.
저는 2008년 DNC에서 뉴저지 주의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메이순의 아이들"이라는 재단을 설립해
저의 부모님이 저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희망을 팔레스타인의 난민 아이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지금 TED의 이 순간 이전에 말이죠.-
(웃음)
(박수)
그러니까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가 그 남자,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파키슨 병에 걸려 저처럼 몸을 떠는,
무하마드 알리 앞에서 공연을 했던 때였어요.
(박수)
그 때가 제 아버지가
보신 저의 유일한 공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강의를 아버지의 기억에 바칩니다.
(아랍어)
제 이름은 메이순 자이드입니다.
제가 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박수)
번역: Sujin Byeon
검토: K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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