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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dox of choice | Barry Schwartz


게시일: 2007. 1. 16.


심리학자 Barry Schwartz가 서양사회가 신봉하는 '선택의 자유'에 대해 비판한다. Schwartz에 따르면 선택은 우리를 자유롭게하기 보다, 마비시켰고, 행복을 주기 보다 불만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여러분들이 이미 들은 것들과 연관된 제 책에서 다룬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놓치는 경우에는 제가 연결고리를 만들겠습니다.


제가 '공식화된 신조'라고 부르는 것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떤것에대한 공식화된 신조일까요?

모든 서양 산업사회에 대한 신조입니다.

풀어서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민의 복지 향상에 관심이 있다면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하는 것이 복지 향상의 길입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 인간에게 값지고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사람들이 자유를 가지면 개개인은 각자의 복지 향상을 위하여 행동을 취하게 되고 누구도 우리를 위하여 결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것은 자유를 극대화 하는 길입니다.

선택의 폭이 넓다면, 더 많은 자유를 가지게 되고 자유가 더 확보되면 시민들의 복지는 향상 된다는 논리 입니다.

이 논리는 우리가 매일 들여마시는 공기에 깊게 박혀있어서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즉, 우리 삶에 깊게 내재해 있습니다.


현대문명이 저희로 하여금 가능케 한 몇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다니는 마트입니다. 별로 큰건 아니고요.

샐러드 소스에 국한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슈퍼에는 175가지 샐러드 소스가 있습니다.

10가지 종류의 올리브 오일과 12가지의 발사믹 식초를 이용하여 더 많은 종류의 소스를 만들지 않는다면요.

그렇지만 175가지 소스 중 하나가 당신에게 딱 맞을 확율은 적지요.

이것이 수퍼마켓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음향기기를 사러 전자상가로 갑니다.

스피커, CD 플레이어, 테입프플레이어, 튜너, 앰프 등등

하나의 가게에 이처럼 많은 스테레오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가게에서 스테레오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 조합은 650만 가지나 됩니다.

정말 많은 선택권이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죠.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보죠.

제가 어렸을 때에는 어떠한 전화 서비스라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Bell사에서 나온거라는 전제하에요...

전화기를 빌렸지 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가 '고장'나는 경우는 없게 되는 거죠.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죠.

현재는 거의 무제한 종류의 전화가 있습니다.

특히 휴대전화는요.



지금 보시는 것이 휴대전화의 미래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가운데 있는 MP3 player와 코털 깎기, 그리고 크림 뷜레 토치.

이 상품을 아직 상점에서 보지 못했다면 언젠가는 보시게 될것을 장담 합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상점에 들어가 이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대답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대답은 '없습니다' 입니다.

별 기능이 없는 휴대전화를 사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삶 전체로 볼때 물건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에서도

선택의 폭이 확대된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국에서는 의사를 찾아가면 의사가 당신 보고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의사를 찾아 가면 의사는 '당신은 A를 할 수도 있고, B를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A는 이런 좋은 점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B는 이런 좋은 점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세요?'

당신은 '선생님 어떻게 해야하죠?'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의사는 다시 'A는 이런 좋은 점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B 이런 좋은 점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죠?

의사에게 '저라면 어떤걸 하시겠어요?'라고 하면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아닌걸요?'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환자 자주권'이라고 하기도 하죠.

꽤 좋은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무언가를 알고 있는(의사) 사람으로 부터 몸이 아프고 아는 것이 없어서

의사결정에 있어 최적에 있지 않은 사람(환자)에게 옮기는 것에 불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상으로 한 의약품 마케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는 직접 살 수없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것인 거죠.

그럼 왜 살수도 없는 우리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는 걸까요?

정답은 우리가 내일 의사에게 전화해

처방전의 약을 바꿔달라고 하길 바라는 거죠.



자아 정체성 마저도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슬라이드가 표현 하듯이요.

우리는 자아를 유전 받지않고 발명하게 되죠.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대로 자아를 재발명합니다.

즉, 매일 아침 일어날때마다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족과 결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예전에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결혼하고 아이들을 빨리 갖어야 한다는 가정을 모두가 하고 있었습니다.

실질적인 선택은 누구랑 이었지, 언제 또는 결혼 후에 대해서는 선택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모든게 하기 나름입니다.

저는 훌륭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예전보다 20% 적은량의 과제를 부여합니다.

그들이 좀 덜 똑똑 하다던지 덜 성실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너무나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 할까 말까? 지금 할까?'

'나중에 할까? 아이들이 먼저일까, 일이 먼저 일까?'

이 질문들은 모두 소모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 부여한 과제를 안하고 제 수업에서 낮은 학점을 받더라도

이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실 그래야죠. 이 질문들은 중요합니다 Carl이 지적 했듯이 

우리가 일함에 있어서 이 행성 어디에서나 매일, 매시에 일할 수 있도록 축복 받았습니다.

Randolph 호텔을 제외 하고는요.

(웃음)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지만 WiFi가 되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제가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말씀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일에 관련되어 주어진 선택의 자유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일을 할지 말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면서 허리한춤에 휴대전화를 차고

다른 한춤에는 blackberry를 차고 아마도 무릎위에 노트북을 올려 놓고 있겠죠.

만약 모든 기계들을 꺼 놓는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면서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이메일 답장을 쓸까? 편지를 저장할까?'

이 질문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하더라도

아이들이 축구 경기에 대한 느낌은

질문을 아예 안했을 때랑은 많이 다를 것 입니다.


이제는 어딜 둘러봐도 큰일이나 사소한 일이나, 물질적인 것부터 라이프 스타일까지

인생은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세상을 이랬습니다.

말하자면 물론 선택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모든것이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현재 세상의 모습은 이것과 같습니다.

이게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정답은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지는 모두가 아니깐, 어떤 나쁜점이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무한한 선택은 사람들에게 두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첫번째 영향은 역설적으로 선택은 자유보다는 마비를 야기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너무 많다보면

사람들은 선택 자체를 매우 힘겨워 합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퇴직금 자원 투자에 관한 연구에 관한 예입니다.


제 동료는 Vanguard사의 투자 정보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Vanguard는 거대한 뮤추얼 펀드사로 100만명의 직원과 2000개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동료가 발견한 것은 직원이 10개의 펀드를 추천할 때 마다,

자원 투자에 대한 참여도가 2%가 떨어졌습니다.

50개의 펀드를 추천하면 5개의 펀드를 추천 했을때 보다 10%참여도가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50개 정도의 펀드 중에서 고르려면 너무나도 힘들어서 우선 내일로 미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로, 내일로, 내일로

그리고 내일로, 내일로, 내일로

물론 그 '내일'은 오지 않죠.


이러한 사실은 은퇴 후에 돈이 부족해서 

개 사료로 연명해야 한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의사결정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고용주로 부터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참여를 안함으로서 일년에 5000불 씩을 고용주가 기꺼이 받고 있는 샘이죠.

그러므로 이 마비현상은 선택사항이 너무 많은데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이것 처럼 세상을 바꾸었죠.



만약 평생이 걸린 문제라면 제대로 된 결정을 하고 싶으시죠?

잘못된 펀드나 심지어 잘못된 샐러드 소스도 고르기 싫을거에요.



사람들에게 미치는 두번째 영향은

우리가 마비현상을 극복하고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선택권이 적은 상태에서 선택을 했을때 보다 덜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내우 많은 샐러드 소스 중에 하나를 고르게 되면

-아시다시피 완벽한 샐러드 소스를 고를 순 없죠-

다른 것을 골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상상을 하기 쉽상이죠.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은 이 상상속에서 만들어낸 대안이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고

후회하는 만큼 선택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집니다.

선택 자체가 훌륭했다고 하더라도요.

옵션이 더 많을 수록, 당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기 쉽죠.


두번째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기회비용이 원인입니다.

오늘 아침에 Dan Gilbert가 연설에서 우리가 가치를 매길 때 무엇과 비교하느냐가

가치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대안들이 많다 보면 선택하지 않은 대안들에 대한 매력적인 점들을 상상하게 됩니다.

결국 당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만족도를 떨어 뜨리죠.


예를 하나 들께요. 뉴욕에서 오시지 않은 분께는 죄송하고요.



이 그림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Hampton에 한 부부가 있습니다.

비싼 부동산을 가지고 있고 멋진 해변에 훌륭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죠

더 이상 바랄께 있을까요?


하지만 이 남자는 생각하기를 지금은 8월이고 맨하탄의 내 이웃들은 다 휴가를 가서

내집 바로 앞에 주차를 할 수 있을텐데라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주 내내 매일 좋은 주차 공간을 놓쳤다는 사실에 괴로워 합니다.


기회비용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만족도를 감소 시킴니다.

그리고 옵션이 더 많을 수록 대안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이 우리에게 기회비용으로 반영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만화는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는데요.

순간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과

천천히 일을 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주지만

당신이 무엇을 골라서 하던

다른 것은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리고 하지 않기로 한것은 많은 매력이 있을 테고

결국 지금 하고 있는것이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세번째로는 기대감의 상승입니다.

제가 청바지를 사러 갔을때 이것을 깨닳았습니다.

거의 항상 청바지를 입는데요.

예전에는 딱 한가지 스타일로만 나올때가 있었습니다.

사면 잘 맞지 않고

엄청 불편하고

오래 입고 몇번 빨아야

좀 입을만 해집니다.

저는 수년간 입던 청바지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러 가서

"청바지를 하나 사고 싶은데, 여기 제 싸이즈입니다"라고 하니

점원이 말하기를

"슬림 fit을 드릴까요? easy fit? relaxed fit을 드릴까요?

지퍼와 버튼중 어떤것을 원하세요? 색감은 어느 정도로 원하시죠?"

"오래 된것 같은 느낌을 넣을까요?"

"부츠컷으로 드릴까요? 통이 좁아지는 스타일을 드릴까요" 등등 점원은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입이 떡 벌어지고 난 후 정신을 차리고 저는 말했습니다.

예전에 하나밖에 없던 그 스타일로 주세요


점원은 그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죠.

어쩔 수 없이 한시간동안 온갖 청바지를 입어보고 나서야

가게를 나왔어요. 사실은 생애 최고로 잘 맞는 청바지를 샀습니다.

예전보다 낳았어요. 폭넓은 선택이 이 모든것을 가능케 했죠.

하지만 기분은 예전보다 별로 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이걸 설명하는냐 책 한권을 써버렸죠.

(ㅎㅎ)


제가 기분이 별로 였던것은 가능한 옵션이 많아진 상황에서

청바지가 어느정도 좋아야 하냐에 대한 제 기대치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기대치가 낮았죠.

한가지 스타일로 나올때는 특별한 기대감이 없죠.

100가지 스타일로 나오게 되면 그 중 하나는 완벽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고른것은 좋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고른것과 예상한 것과 비교하게 되고 제가 예상한것 보다 실망하게 됩니다.

사람의 삶에 선택을 더 주는 것은 사람들이 그 선택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좋더라도 덜 만족을 하게 만듭니다.

마케팅계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저희가 애초에 이런 사실을 몰랐겠죠.

진실은 이 그림에 가깝습니다.



모든것이 안좋던 시절이 좋은 이유는 모든것이 안 좋으면

사람들은 기분좋은 놀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풍족하고 산업화 사회에 사는 우리는 기대감에 대한 완벽성때문에

우리가 바랄 수 있는것의 최상은 우리가 예상하는 딱 그만큼입니다.

기분좋게 깜짝 놀랄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기대감은 이미 지붕을 뚫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인 행복의 비밀은 바로 낮은 기대감에 있습니다.


제 자서전적 이야기를 좀 하자면 전 아내가 있고 그녀는 너무 좋습니다.

저는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잘 한일이죠.

물론 정착하는게 아주 나쁜건 아니고요.

마지막으로 세상에 한가지 종류 밖에 없는 잘 맞지 않는 청바지를 샀을때의 결과는 

당신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문합니다.

누구의 책임인가? 답은 명확합니다.


세상 탓 입니다. 당신이 무얼 할 수 있었겠어요.

수백개 스타일의 청바지가 있고 당신이 산 청바지가 마음에 안든다면 누구 탓 일까요?

그건 당신 탓이라는 것 또한 명확합니다.

더 잘 고를 수 있었겠죠.

수백가지의 청바지가 전시되어 있는 상황에서 선택 실패에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가 좋더라도 선택을 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을 자책합니다.

한 세기동안 우울증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저는 우울증 환자와 자살의 증가의 중요한 원인중에 하나가 

사람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음에서 오는 실망에 따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자신에게 설명하려 할때 이것들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객과적으로 잘살고 있지만 느끼는 기분은 더 나뻐졌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공식화된 신조' 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선택권이 아예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선택권이 무조건 더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모르지만 적정량이라는 것이 있죠.

저희의 복지 향상에 도움이 되는 수준의 적정량은 이미 지났습니다.




이제 거의 끝나가는 데요,

정책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에서 기인합니다.

세상는 아직도 선택의 폭이 너무 많아서가 문제가 아니고 너무 적어서 문제인 곳이 많습니다.

그 중 우리는 몇 군데만 들어 봤을 뿐이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이 이상한 문제는 현대화되고 풍요로운 서구 사회의 것입니다.


정말 화나고 좌절하게 하는 것은 Steve Levitt이 어제 말한 비싸고 설치가 어려운

유아용 자동차 시트가 무용지물이고 돈 낭비라고 했는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비싸고 복잡한 선택이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상처를 준다는 점입니다.

사실은 전보다 못한 상태로 만들죠.


우리가 이렇게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요소를 선택권이 별로 없는 사회로 이전을 한다면 

그들의 삶이 향상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질도 향상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파레토적 개선 움직임입니다.

소득 재분배는 가난한 사람 뿐 아니라 모두를 더 낳아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의 과잉 우리를 망치기 때문이죠.



결론입니다. 이 만화를 보면서

좀 배운 사람으로서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물고기가 몰 알겠어? 이 수조안에서는 무엇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빈약한 상상력, 세계를 바라보는 근시안 등이 이 만화를 볼때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계속 보고 있자면 물고기가 뭔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만약 수조를 깨버려서 모든것을 가능케 한다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마비 됩니다.

만약 수조를 깨버려서 모든것을 가능케 한다면 만족감을 감소 시킵니다.

마비도를 증가시키도 만족도를 감소시킵니다.

모두가 자신만의 수조가 필요합니다.

이 수조는 당연히 너무 작죠.

우리뿐만 아니라 물고기 한테도요.


하지만 은유적인 표현으로의 수조가 없다면 괴로움의 지름길 입니다.

재앙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감사합니다.


번역: Seungwoo PAEK 

검토: Hahn 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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