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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learned as a prisoner in North Korea | Euna Lee


게시일: 2017. 10. 20.



최근에 저는 ‘젊은 일꾼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글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읽었습니다.

제 눈을 사로잡은 한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 단순히 말만 하지 말라’

‘영향력을 행사하라!’

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데요.

아마 훨씬 많을 수도 있지만

대학시절의 제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는 한 구절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영향력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다큐멘터리 저널리스트가 된 이유이고

그 이유로 저는

수감자가 되어 북한에 140일 동안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2009년 3월 17일.

여러분 모두에게 그날은 성 패트릭스 데이였지만 저에게는 삶이 180도 뒤바뀐 날이었습니다.

저와 제 팀이 제작하고 있던 다큐는 북한 난민에 대한 것으로 그들은 중국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국경에 있었어요.

마지막 촬영 날이었지요.

철조망도 없고 차단 장치도 없고 국경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없던 곳이었지만

그곳은 바로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용하는 탈출 경로였습니다.

아직 겨울이었고 강은 얼어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강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우리는 추운 날씨의 실상을 촬영하고 주변 환경도 담았습니다.

탈북자들은 이런 조건을 뚫고서 자유 세계로 탈출하는 것이죠.

그런데 갑자기 팀원 한 명이 소리쳤습니다.

“군인이다!”

뒤를 돌아보니까

녹색 군복에 총을 든 덩치 작은 군인 두 명이 우리를 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어요.

‘머리에 총을 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중국 땅을 밟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드디어 저는 중국 땅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동료 ‘로라 링’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 짧은 순간, 어찌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다만 제 동료를 그곳에 혼자 두고 갈 수 없음을 알 수 있었지요.

로라가 말했어요. 

“유나, 다리에 감각이 없어.”

그 짧은 찰나에 우리는 북한군 두 명에게 포위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군 기지로 끌고 가야 한다는 사명감 만큼은 확실해 보였지요.

저는 제발 살려 달라고 소리치며 사정했습니다.

중국 땅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주기를 바라면서 

그 국경에서 진퇴양난의 상태로 총격훈련을 받은 군인과 대치하고 있었던 거죠.

군인의 눈을 봤어요.

단지 소년에 불과했지요.

그 순간 그 군인이 총을 치켜 들고 절 치려고 했지만 망설이고 있는 것을 봤죠.

그 군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고 총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전 소리쳤어요.

“그래요. 알겠어요. 따라갈게요.”

그리고 일어섰습니다.

군 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저 머리가 빙빙 돌았습니다.

제 동료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저들의 적이야”

라고 말했는데 그녀의 말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적이었습니다.

무서움에 벌벌 떨어야 맞는 거였죠.

그런데 저는 계속해서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한 장교가 자신의 코트를 저에게 가져다 줬는데 절 춥지않게 해 주려는 거였죠.

왜냐하면 저는 그 언 강 위에서 코트를 잃어버렸거든요.

그 군인들과 대치하는 동안에요.


이상한 경험이란 게 어떤 것들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남한에서 자랐습니다.

저희에게 북한은 늘 적이었죠.

심지어 제가 태어나기 전에도 남과 북은 63년 동안 휴전 상태에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줄곧.

80년대, 90년대에 남한에서 자란 우리는

북한에 대한 선전 교육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듯한 이야기들도 수없이 많이 들었죠.

예를 들면, 어린 소년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이유가 북한 간첩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또는 이런 만화 영화 시리즈를 봤는데 어린 남한 소년이 뚱뚱하고 거대한 붉은 돼지를 물리치는 이야기였고,

그 돼지는 북한의 초대 지도자를 상징한 거였죠.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은 결과로 어린 마음에 한 단어가 새겨 졌습니다.

“적”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전 그들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북한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모두 북한 정부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제, 제가 갇혀있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 날이었어요.

감방에 갇혀 있었죠.

국경에서 잡혀 온 다음부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젊은 교도관이 제 감방으로 다가오더니 조그만 삶은 계란을 제게 내밀었어요.

"이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줄 거예요"

라면서 이게 어떤 건지 아시겠어요?

작은 친절을 적의 손으로부터 건네 받는 것이요?

그들이 제게 친절하게 대할 때마다 최악의 상황이 

그 친절 뒤에 기다리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장교는 제가 초조해 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 모두가 붉은 돼지라고 생각하는 거요?”

라고 말했습니다.

방금 전 보여드린 바로 만화 얘기였어요.


매일매일 심리전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심문하는 사람은 저를 탁자 앞에 앉게 하고 일주일에 6일 동안을 저의 여정과 일에 대해 쓰라고 했습니다.

쓰고 또 쓰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반복되었죠.

감금된 지 3개월 후에 북한 법원이 제게 선고를 내렸는데

12년 간을 노동수용소에서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방에 앉아 이송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두 명의 여성 교도관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 보았습니다.

교도관 A 는 손 위였고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교도관은 가정이 넉넉한 듯 보였어요.

가끔씩 이런 색깔 있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서는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교도관 B는 손 아래였는데 노래를 아주 잘 불렀습니다.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가끔씩은 지나칠 정도였는데 자기도 모르게 저를 고문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거죠.

(웃음)


그 교도관은 아침이면 화장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는 여느 소녀들의 일상과 마찬가지였죠.

중국드라마도 즐겨 보더라고요.

수준이 훨씬 높은 드라마를요.

교도관 B이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이걸 본 다음엔 다른 TV프로그램은 더 이상 못 보겠어”

그 말을 하고 혼이 나더라고요.

자신의 나라에서 만든 TV프로그램을 깎아 내렸기 때문이었죠.

교도관 B는 교도관 A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각의 소유자였는데 

B가 솔직한 자기표현을 할 때면 A가 가끔 큰소리로 그녀를 혼내곤 했습니다.


하루는, 그 두 교도관이 다른 모든 동료 여성 교도관들을 초대했어요.

그들 모두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릅니다만 

제가 갇혀 있던 곳으로 왔고 저를 초대해서 그들의 방으로 데려가더니 묻더라고요.

남녀간에 하룻밤 만남이 미국에서는 실제로 가능하냐고요.

(웃음)


북한의 젊은 남녀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 바로 공공장소에서 손잡는 행위입니다.

저는 이들이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요.

제가 말도 하기 전에 교도관들은 부끄러워하며 킥킥거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가 죄수라는 걸 잊은 것 같았고 제 고등학교 교실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습니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이 소녀들도 비슷한 만화를 보며 자랐다는 거예요.

단지 남한과 미국에 대한 선전물 밖에 되지 않는 그것을.

저는 이들의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 소녀들이 우리가 적이라고 배우며 자랐다면 

우리를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내가 그들을 두려워 하는 것과 마친가지인 것이죠.


하지만 그 순간, 우리 모두는 그냥 소녀였습니다.

같은 관심사를 나누는 그런 것이요.

우리를 갈라 놓은 이념 따윈 넘어선 것이었죠.

저는 'Current TV'의 사장님께 이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 온 다음에요.


사장님의 첫 반응은,

“유나, 스톡홀롬 신드롬을 들어봤어?”

그래요.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 공포의 감정 위협감 저와 심문자 사이에 고조되던 긴장감.

우리가 정치와 관련된 말을 할 때는 그랬습니다.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서 마주하던 때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일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 아이들의 미래, 그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 할 때였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오기 약 한 달 전 쯤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많이 아팠어요.

교도관 B가 제방으로 찾아와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녀가 그 수용소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죠.

그 교도관은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고 듣고 있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몸도 빨리 낫고 가족에게 곧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래요.”

이게 바로 그들입니다.


자신의 코트를 갖다주던 장교 삶은 계란을 내밀던 교도관

미국에서의 연애방식을 묻던 여자 교도관들

그들이 바로 제가 기억하는 북한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죠.

북한 사람들과 저는 각자의 나라의 대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표하는 것은 바로 인류입니다.


현재 저는 제 집으로, 제 삶으로 돌아 와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기억은 시간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지요.

그리고 전 이곳에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을 분노케 한다고 읽게 되고, 듣게 되는 곳에.

제가 깨달은 게 있는데요, 참 쉽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시 그들을 적으로 대하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늘 그 곳에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인류애를 볼 수 있었던 그 때를요.

증오를 넘어 섰던 

내 적의 눈빛을...

감사합니다.


(박수)


번역: Soo Jin LEE 

검토: Jihyeon J.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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